언러닝이란?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70년 저서 《미래쇼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learn), 배운 것을 의도적으로 잊고(unlearn), 다시 배우는(relearn)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50년 전에 쓰인 이 문장이 AI가 일상에 들어온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ChatGPT가 등장한 지 채 3년이 안 된 사이에, 대학생은 AI로 리포트를 쓰고, 개발자는 AI에게 코드를 짜달라고 하고, 디자이너는 AI로 이미지를 생성한다. 세상이 이 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우리의 학습 방식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언러닝은 단순히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유효했으나 현재의 성장에 제약을 가하는 사고방식과 고정관념, 행동 양식 등을 의도적으로 내려놓는 과정이다. 비워야 새로 채울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의도적이라는 단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은 단순한 망각이다. 언러닝은 그와 다르다. "이 방식이 지금도 맞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부분을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행위다.
그래서 언러닝은 학습(Learning)의 반대가 아니라 학습의 전제 조건에 가깝다. 컵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물을 부을 수 없듯이, 기존의 사고 프레임을 비워야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기존에 쌓아온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업데이트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AI의 발전은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가치를 크게 높였다. 이 변화 속에서 기존의 학습 패러다임을 고수하면 세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정보를 많이 암기하는 사람이 유능하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유효했다. 학교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방법이었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AI에게 질문 하나 하면 수십 페이지 분량의 정보를 정리받을 수 있는 시대에, 단순 지식 보유량의 경쟁력은 급격히 낮아졌다.
이제 중요한 건 정보를 조합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같은 주제를 검색해도 AI가 제시하는 답변의 맥락을 파악하고, 어떤 정보를 취하고 어떤 정보를 걸러낼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많이 아는 것"에서 "잘 질문하고, 잘 판단하는 것"으로 역량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IT, 마케팅, 의료 등 기술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는 3~5년 전의 지식이 이미 구식이 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카카오 정신아 CA 의장은 2026년 신입 사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제의 답이 오늘의 정답이 아닐 수 있는 만큼, '내 방식이 맞다'는 과거형 확신을 내려놓고 새롭게 학습하며 성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¹⁾ 이 말은 단순한 훈화가 아니다. 2025년부터 AI 에이전트가 이메일 발송, 보고서 작성, 데이터 분석까지 대신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안주가 곧 도태를 의미하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관점을 차단한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조직, 심지어 세계 1위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노키아는 2008년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했던 공룡 기업이었다. 그런데 불과 4년 만인 2012년, 점유율이 8.2%로 추락하며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되었다.²⁾ 노키아는 기술력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노키아 중간 간부 하카라이넨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아이폰 출시 3년 전에 이미 스마트폰을 개발했으나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내부 오판으로 개발이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CEO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는 아이폰을 "장난 같은 제품"이라고 평가 절하하기까지 했다.³⁾
코닥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한 회사다. 1979년에는 "2010년이면 시장이 디지털 카메라로 전환된다"는 내부 보고서까지 작성했다.⁴⁾ 하지만 당시 코닥의 수익 핵심은 필름 사업이었고,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 필름 매출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상용화를 미뤘다.⁵⁾ 결국 201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세계 최초로 미래 기술을 개발하고도, 과거의 성공 모델을 내려놓지 못해 무너진 것이다.
노키아와 코닥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문제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기존 성공 경험에 대한 과신이었다. 이것이 바로 언러닝이 필요한 이유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학습 방법, 업무 방식, 사고 패턴이 지금도 유효한지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만의 '필름 사업'을 붙들고 있는 셈이 된다.
언러닝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작은 습관부터 바꿔볼 수 있다.
늘 해오던 방식에 "왜 이렇게 하고 있지?"라고 물어보는 것이 출발점이다. 의심 없이 반복하는 루틴일수록 점검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이것이 틀렸다면?"이라는 가정을 세워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케팅 담당자가 "SNS 광고가 가장 효율적인 채널이다"라고 믿고 있다면, "만약 AI 에이전트가 구매 결정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이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런 사고 실험 자체가 언러닝의 훈련이 된다.
AI에게 같은 주제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면, 자신이 가진 편향을 발견하기 쉬워진다. "내 의견을 비판해줘"라고 요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AI를 자기 확인 편향의 도구로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내 의견을 강화할 논거를 만들어줘"라고 요청하면 AI는 훌륭하게 해내지만, 그것은 언러닝의 정반대다. AI를 언러닝의 도구로 활용하려면, 의도적으로 반대 관점을 요청해야 한다.
인풋(읽고 듣기)에 머무르지 말고, 배운 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좋은 인풋을 많이 넣으면 아웃풋이 자연스럽게 나올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실제로 빠르게 배우고 싶다면 아웃풋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것은 언러닝과도 직결된다. 글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어? 이 부분은 예전에 배운 건데 지금은 좀 다른 것 같은데?"라는 인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바로 언러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언러닝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습관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 하나의 고정관념을 인식하고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핵심이다. 작은 변화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습관화하고 일상에 내재화하는 것이 성공적인 언러닝의 조건이다.
배움(Learning) → 비움(Unlearning) → 다시 배움(Relearning).
토플러가 50년 전에 제시한 이 순환 구조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실용적인 학습 프레임워크가 되었다.
코닥에게는 디지털 카메라 기술이 있었고, 노키아에게는 스마트폰 개발 역량이 있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성공 공식을 내려놓는 용기였다. 쌓아온 경험과 지식 위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업데이트하는 과정.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판단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오늘 하나만 해보자. 가장 확신하는 나의 믿음 하나를 꺼내서, "정말 아직도 그럴까?"라고 질문을 던져보는 것. 그것이 언러닝의 시작이다.
¹⁾ KB금융그룹, "[시사금융용어] 언러닝(unlearning)" (2026.01) https://kbthink.com/news-list/view.html?newsId=20260114073002064
²⁾ 제민일보, "노키아·LG스마트폰 몰락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2021.06) https://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19556
³⁾ gobooki.net, "노키아는 왜 성공했고 왜 몰락했을까?" (2024.10) https://gobooki.net/흥망성쇠-노키아는-왜-성공했고-왜-몰락했을까/
⁴⁾ 한국일보, "필름시장 1위 코닥, 디카 대중화 대처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2019.09)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2071442777462
⁵⁾ Byline Network, "요즘 구글을 보면서 코닥이 떠오른 이유" (2023.01) https://byline.network/2023/01/0111-2/